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브라간사의 카타리나 (문단 편집) == 생애 == 1662년에 [[잉글랜드]]의 [[찰스 2세]]와 정략결혼하였다. 결혼 협상에서 포르투갈은 [[에스파냐]]에 대항하기 위한 군사적 지원을 요구했다. 그 대가로 잉글랜드는 포르투갈로부터 [[브라질]]과 [[동인도]]에서의 무역권과 여러 식민지, 그리고 200만 크라운을 지참금으로 얻어냈다. 결혼식은 1662년 5월에 [[포츠머스(영국)|포츠머스]]에서 [[영국 국교회]]([[성공회]])식으로 치러졌다. 그러나 공식 결혼식 이전에 비밀리에 [[가톨릭]] 결혼식([[혼인성사]])을 진행했다고 한다. 결혼 후 본명인 카타리나에서 [[영어]]식인 캐서린으로 불리게 되었다. 캐서린은 찰스 2세와 함께 자신이 좋아하는 포르투갈 악기 연주와 불꽃놀이 속에서 화려하게 [[런던]]에 입장했다. 캐서린은 어릴 때부터 [[수녀원]]에서 자라 독실하고 조용하며 차분한 여성이었다. 찰스 2세의 어머니인 [[프랑스의 헨리에타 마리아|헨리에타 마리아]]는 자신과 같은 가톨릭 신자인 며느리를 마음에 들어했다. 문제는 캐서린의 남편이 역대 잉글랜드의 국왕들 중에서 손꼽히는 [[호색한]]이였던 찰스 2세였다는 것. 순진한 캐서린은 남편의 [[로얄 미스트리스|정부]]가 10명이 넘는다는 사실(...)을 알고 매우 놀랐다. 그럼에도 캐서린은 남편의 사랑과 존중을 받은 여인으로 평가받는다. 찰스 2세가 결혼 초기에는 아내인 캐서린을 무시하고 정부도 많이 들였지만, 갈수록 캐서린을 아꼈기 때문이다. 찰스 2세는 자신의 정부가 바람을 펴도 그다지 신경쓰지 않았으나 캐서린이 남자 시종에게 웃어준 것에 대해선 질투했다는 기록이 남아있다. 캐서린은 바람기 가득한 남편을 이해하고 사랑하였다. 전임자인 시어머니 헨리에타 마리아와 마찬가지로, 캐서린은 영어를 못하는 가톨릭 신자라는 이유로 대중들에게 인기가 없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날수록 예의바른 태도와 남편을 향한 충실하고 정숙한 아내의 모습으로 조금씩 인식을 바꾸어갔다. 또한 이따끔씩 편한 옷을 입고 자유롭게 잉글랜드를 돌아다니며 친숙한 이미지를 이끌어내기도 했다. 캐서린은 카드놀이와 낚시, 소풍을 즐겼으며 변장을 하고 몰래 시골 축제에 참여하기도 했다. 반면 대대로 이어진 [[가톨릭]]을 향한 경계로 [[잉글랜드]] 귀족들의 왕비를 향한 반감은 커져갔다. 잉글랜드 의회는 종종 국왕과 대립할 때 정치적 카드로 왕비를 거론하면서 이혼을 종용했다. 캐서린은 3차례 아이를 [[유산(의학)|유산]]한 이후에 몸이 크게 상해서 더 이상 [[임신]]을 할 수 없었기 때문에, 이러한 의회의 폐위 요구에 대항할 수 있는 왕비로써의 입지가 없었다. 신하들은 찰스 2세에게 "캐서린을 폐위하고 개신교도인 새 왕비를 맞이하라"고 간언했다. 하지만 찰스 2세는 신하들의 요구를 모두 거부했고, 캐서린은 찰스 2세가 죽을 때까지 왕비 자리를 유지할 수 있었다. 찰스 2세는 신하들을 진정시키기 위해 가톨릭 사제들을 잉글랜드에서 모두 추방해야 했다. 캐서린은 자신의 [[고해성사|고해]][[신부(성직자)|신부]]도 추방당했으나 이에 관해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러나 타지에서 위로가 되어준 신앙 활동을 하기 힘들어지면서 더욱 쓸쓸한 궁중 생활을 해야 했다. 1685년에 찰스 2세가 숨을 거두었다. 찰스 2세 사후에도 왕대비인만큼 캐서린은 잉글랜드에서 왕족으로 대우받았다. 하지만 종교 문제로 [[윌리엄 3세]]와의 관계가 좋지 못하여 푸대접을 받자 이를 견디지 못하고 모국인 [[포르투갈]]로 돌아갔다. 포르투갈에서 왕족으로 대우받으며 살다가 1705년에 [[리스본]]의 벰포스타 궁전에서 67살의 나이로 사망하였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